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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3) - 전라좌수사 발탁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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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17-01-20 17:46 조회2,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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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이순신 전라좌수사 발탁의 진상                     

[이순신 리더십] [3]

역모 연루된 정언신 문안 뒤 일시 좌천 이어 전라좌수사로
파격적인 등용 지시한 선조는 사간원이 반대하자 엄하게 지시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이순신에 바다 맡기고 신임 과시

송우혜 소설가송우혜 소설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였던 것은 그 대전쟁의 향배와 과정과 결말에까지 막중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떻게 그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가.

그건 선조가 지녔던 이순신에 대한 강한 신임 때문에 가능했다. 선조는 니탕개(尼湯介)의 난 때 이순신이 세운 전공을 매우 크게 평가해서, 그간 여러 번 이순신에게 커다란 특혜를 베풀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 역시 그런 특혜 중 하나에 해당한다.

이순신이 '옥중 역적 정언신'을 문안하고 종6품 정읍현감으로 전격 좌천된 지 1년 2개월이 되었을 때, 선조는 "이천, 이억기, 양응지, 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고 비변사에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2일). 그 네 무장을 "남쪽 바다를 방어하는 수사(水使)로 임명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시국에서 그 명령은 놀라운 것이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넘도록 숨어 있는 조무래기 '역적'들까지 뒤져서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며 처벌하던 중이었다. 모든 벼슬아치가 역모 사건 관련자와 엮이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연히 신하 중에는 감히 '역적 정언신과 친한 무장 이순신'이 승진하도록 추천할 자가 없었다.

왕조 시대에는 '역모'가 가장 극악한 범죄였기 때문에 대응 방식도 매우 잔혹했다. 역모의 대상이 임금이기에, 신하들로선 역모 관련자라면 무자비하게 다루는 것이 충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억울한 희생자가 많았다. 정여립의 조카인 장령(사헌부 종4품관) 이진길은 역모 사건이 터지자 단지 조카라는 이유로 파면과 동시에 체포돼 고문받으면서 역모 가담 의혹을 극력 부인하다가 매 아래 죽었다. 그가 추천해 관리가 된 이들 모두 역모와 전혀 무관했는데도 "역적의 추천으로 관리가 되었다"는 이유로 모두 파면됐다.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이순신 전라좌수사 발탁의 진상 /이철원 기자
그처럼 험했던 시국을 생각하면, 이순신이 거물 역적으로 꼽혔던 정언신을 옥중으로 찾아가 문안하고도 파면이나 체포되지 않고 현감으로 좌천된 것 자체가 특혜에 해당했다. 그런 상황이라서 오직 임금만이 "이순신을 다시 쓰겠다"고 할 수 있었는데, 선조가 이때 바로 그걸 한 것이다.

선조의 명을 받은 비변사에서는 그래도 시국을 감안해서 그랬는지, 이순신을 남쪽 바다를 지키는 네 수영(水營: 경상좌수영·경상우수영·전라좌수영·전라우수영)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전라좌수영을 담당하는 전라좌수사로 배정했다. 전라좌수영은 다른 수영들의 절반 규모에 불과했다.

그런 절차를 거쳐서 선조 24년 2월 13일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됐다. 종6품 정읍현감을 품계가 7단계 더 높은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일단 종4품 진도군수로 승진 발령했다가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건 관리를 특별히 초수(招授·정해진 규정을 크게 뛰어넘은 임명)할 때 관행으로 흔히 썼던 편법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에 사간원(司諫院·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담당한 관아)에서 들고일어나서 반대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官爵)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그러자 선조는 대답했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

선조의 말에서 크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는 부분이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한 사람의 무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꺼렸던 우려가 말이 되어 나온 것이다. 국력 약한 나라에서 비상 시기에 임금 노릇 하는 일이 지녔던 고달픔이 마음을 친다.

사간원에서 반대 이유로 내세운 명분은 '초수'였다. 그러나 당시 관리 임명의 관행상 초수는 별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이순신 본인 역시 전에도 여러 번 초수의 혜택을 입었다. 대표적 사례로, 이순신이 함경북도 육진에서 종9품 건원보권관으로 복무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귀향해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육진으로 복귀할 때 종4품 조산보만호로 임명됐다. 그때는 무려 10단계를 초수했는데도 대간(臺諫·사간원과 사헌부 관리의 총칭)의 반대가 없었다. 바로 5년 전 일이다.

그로 보아 이때 사간원이 임명에 반대한 실제 이유는 '이순신은 거물 역적 정언신과 가까운 무장'이라는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임금이 직접 밀어준 자이기에 "역적과 친한 무장이라 안 된다"는 말로 반대하지는 못해도, 그렇게 흠결 있는 자의 승진은 '초수'를 이유로 내세워서라도 막는 것이 옳다고 본 것이다. 물론 선조도 그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바로 그 렇기 때문에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는 아주 파격적인 명령으로 사간원의 반대에 대응한 것이다.

선조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순신에게 남쪽 바다 방어를 맡기고 싶었을 만큼 그의 역량과 재능을 믿었고, 끝내 전라좌수사 임명을 관철했다. 그 일은 다른 면으로 보자면, 당시 선조가 일본의 침공을 확신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방증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17/20170117028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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