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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비밀은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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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20-05-13 14:13 조회7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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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비밀은 희생이었다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노르망디서도… 루스벨트家 여덟 아들은 언제나 최전선에 섰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12 21:30 | 수정 2020.05.13 01:20


26대 루스벨트 아들·손자 10명 모두 참전 - 아들 넷, 1차대전 참전… 조종사 막내 戰死
손자 6명과 32대 루스벨트 아들 4명은 2차대전 최전선에… 훈장만 수십개 달해

중년에 다시 입대한 장남, 노르망디서 사망 - 1차대전 참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장남
2차대전 나자 지팡이에 기댄채 戰線으로 "가장 먼저 상륙하게 해달라" 목숨 던져

신검 떨어진 케네디는 청탁까지해 입대 - 사관후보생 신체검사 연거푸 떨어지자
루스벨트 친구였던 부친이 '입대 청탁'… 美 대통령 리더십의 비밀은 희생이었다

송동훈 문명탐험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는 날씨 좋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유독 비와 구름이 많은 곳이다. 노르망디로 향했던 9월의 어느 날, 계절이 좋았든지 혹은 운이 좋았든지 파리에서 출발해 루앙(Rouen), 캉(Caen), 바이외(Bayeux)를 거쳐 오마하(Omaha) 해변으로 가는 며칠 동안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했다. 전형적인 프랑스의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도착한 오마하 해변은 빈에서 시작해 베를린·파리를 거쳐 노르망디에 이르는 긴 여정의 최종 목적지였다. 그해는 역사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고, 2차 대전의 변곡점이 됐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된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의 역사적 현장들을 둘러보기에 완벽한 해였다. 우리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그저 거대하고 유명한 군사작전의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자유를 가져다 준 전투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1944년 6월 6일부터 유럽은 히틀러와 나치의 가혹한 압제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노르망디의 해변들은 숭고하나 참혹했던 그날의 전투를 다양한 유적과 기념물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오마하 해변 바로 옆의 '노르망디 미국인 묘지(Normandy American Cemetery)'가 대표적이다.

남의 자유를 위해 나의 생명을 걸다


묘지는 우울하거나 음침하지 않다. 오히려 밝고 정갈하며 아름답다.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잔디밭 위로 하얀 십자가 수천 개가 줄 맞춰 가지런히 서있다. 십자가에는 저마다 한 사람씩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형제다. 누군가의 남편이거나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 십자가는 다만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뿐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한 가족이 느꼈을 슬픔과 극복해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담고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노르망디 미국인 묘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의 무덤. 전직 대통령 아들로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하던 일을 멈추고 재입대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한 최고위 장성이었고, 최고령 군인이었다.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묘지를 방문하는 많은 미국인에게 ‘리더란 무엇인가’를 침묵 속에서 웅변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런 십자가가 이곳에만 무려 9388개나 된다. 모두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한 미군(美軍)이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먼 프랑스 땅까지 와서 싸우다 죽었을까? '자유를 위해서'라는 표피적이고 단순한 이유는 교과서에서라면 모를까, 무덤이 즐비한 이곳 노르망디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남의 자유가 나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남의 자유를 위해 산화했다. 조국(祖國)의 명에 따라? 감히 어떤 조국이 이곳에 묻힌 이들을 포함한 수십만 꽃다운 청춘에게 목숨을 걸고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 명할 수 있을까? 답을 찾지 못한 채 십자가 사이를 서성이다 문득 한 이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모든 '루스벨트'는 최전선에 있다

루스벨트 주니어는 관절염으로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루스벨트 주니어는 관절염으로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위키피디아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THEODORE ROOSEVELT JR)'.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의 장남이었다. 작은 십자가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인 1944년 7월 12일에 죽었다. 계급은 육군 준장이었고, 군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현직 대통령의 피붙이인 루스벨트 주니어가 노르망디에 묻혀있다는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직업군인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의 죽음에 얽힌 스토리를 알게 된 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공부할 때였다. 미국의 여론이 참전 쪽으로 기울던 1941년 초, 케네디는 결장·위·척추에 문제가 있었는데도 입대하려 했다. 주변의 예상대로 케네디는 육군과 해군의 사관후보생 선발시험에서 연이어 탈락했다.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를 졸랐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로 영국 대사까지 지낸 케네디 아버지는 군 인맥을 동원, 아들의 신체검사 서류를 조작해 입대시켜줬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굳이 '병역 비리'를 저지르면서까지 입대하려 했던 케네디의 노력이 낯설었다. 이때 불현듯 현역 대통령의 아들은 전쟁 중에 무엇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기록을 찾아보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아들이 4명 있었는데 전원 참전했다. 큰아들은 해병대, 둘째 아들은 공군, 셋째와 넷째는 해군에 복무했다. 대통령의 아들들은 안전한 후방에 머물지 않았다. 최전선에서 싸웠다. 네 아들이 받은 훈장 20개가 그들의 용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명예훈장 다음인 해군십자훈장 한 개와 그다음인 은성훈장 두 개가 포함돼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자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때 루스벨트 가족은 막내 쿠엔틴(Quentin)을 잃었다. 공군 조종사였던 쿠엔틴은 파리 바스티유 상공의 공중전에서 산화했다(1918년 7월). 살아 돌아온 세 형은 전후에 사회로 복귀했다. 특히 장남 루스벨트 주니어는 정·재계에서 두루 활약했다. 정부에서는 해군차관보, 푸에르토리코 총독, 필리핀 총독을 역임했고 민간에서는 금융회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이사회 의장, 당대 최대 출판사였던 더블데이의 부사장을 역임했다. 부족함 없는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루스벨트 주니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대령으로 다시 입대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두 동생도 재입대했다. 아버지들이 이러니 아들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물을 필요조차 없다. 루스벨트 주니어의 세 아들을 비롯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여섯 손자 전원이 참전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손자들, 현직 대통령의 아들들은 그렇게 최전선에 서있었다.

솔선수범하는 것이 리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루스벨트 주니어는 4보병사단 부사단장이었다. 그는 작전본부의 만류에도 "그것이 나의 의무"라며 선봉을 자청했다. 나치의 포대와 벙커들이 즐비한 해안에 제일 먼저 상륙하겠다는 건 죽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1944년 6월 6일 새벽, 관절염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루스벨트 주니어는 4보병사단 소속 8연대의 어린 병사들과 함께 가장 먼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작전에 투입된 최고령 병사였고, 최고위 장성이었다. 다행히 전투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기력은 모두 쇠한 후였다. 한 달 후 그는 심장마비로 전선에서 죽었다. 함께 상륙작전에 참가한 셋째 아들 쿠엔틴 대위가 임종을 지켰다. 명예훈장은 그 직후에 수여됐다.

내가 찾던 답은 루스벨트의 십자가에 있었다. 대통령의 아들과 손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참전했기 때문에 국가는 '감히' 국민에게 싸워달라고 청하고, 국민은 '기꺼이' 동참했던 것 아닐까? 미국은 특이한 나라다. 불과 240여 년 만에 대서양 연안의 보잘것없는 13개 식민지에서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역사상 존재했고, 오늘날 살아남은 대부분의 민족과 공동체는 생존하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 현실인데, 미국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지만 솔선수범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날 오마하의 긴 모래사장은 푸르른 가을 날씨와 조화를 이뤄 멋진 풍광을 연출해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주니어가 남긴 감동보다는 못했다. 다시 노르망디를 찾게 되면 꼭 그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를 놓을 생각이다.

[역대 미국의 대통령들]

나라 지키려 목숨 걸었거나, 흙수저로 자수성가했거나, 스토리의 주인공이거나… 

미국의 대통령은 어떤 사람들일까? 좀 더 정확한 질문은 '미국인들은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까'일 것이다. 초대 조지 워싱턴부터 45대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몇 가지 패턴이 있다.
 

F. 루스벨트, 케네디, 워싱턴, 아이젠하워, 링컨(왼쪽부터). F. 루스벨트, 케네디, 워싱턴, 아이젠하워, 링컨(왼쪽부터). /위키피디아

첫째는 압도적으로 군인 출신이 많다.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을 비롯, 그랜트(18대·남북전쟁 북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34대·2차 대전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등이 대표적이다. 남북전쟁 이후 그랜트부터 매킨리(25대)까지 30여 년 동안 대부분의 대통령이 북군 참전용사였다. 2차 대전 이후 아이젠하워부터 최근에 사망한 아버지 부시(41대)까지 40년 동안은 전원이 2차 대전 참전용사였거나 군인이었다.

두 번째 패턴은 흙수저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링컨(16대), 존슨(17대), 닉슨(37대), 레이건(40대)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군인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경우도 있다.

세 번째 패턴은 강력한 스토 리의 주인공이다.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32대)가 좋은 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미국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거나,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민중의 삶을 이해하거나, 유권자를 매료시킬 스토리의 주인공에게 표를 던져왔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은 꽤 예외적이다. 미국이 그만큼 변했다는 증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2/20200512034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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